인공지능(AI), 유전자 편집, 디지털 감시 등 과학기술이 국민의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폭증하면서, 과학기술의 법적·헌법적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회에서 제기됐다. 국회입법조사처는 7월 22일 「과학기술 시대에 대응하는 헌법 제127조 개정 방향」 보고서를 발간하고, 현행 헌법이 과학기술을 ‘경제 수단’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이를 국민의 기본권과 조화되는 ‘헌법적 가치’로 전환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헌법 속 과학기술,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유산'
현행 헌법 제127조 제1항은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1987년 개정 당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시대 배경을 반영한 조항이다.
하지만 2025년 현재, AI와 디지털 기술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이러한 정의가 오히려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보고서는 "과학기술이 인권, 개인정보, 안전, 평등 등 헌법상 핵심 가치와 충돌할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 역할과 책임을 ‘국민경제’라는 틀에 가두는 것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에도 윤리성과 공공성이 필요하다”
보고서는 기술의 발전이 국민의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과학기술에 공공성, 윤리성, 사회적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AI의 불투명한 알고리즘, 플랫폼 기업의 독점적 권력, 유전자 편집 기술이 초래할 생명윤리 문제 등은 헌법적 판단 기준 없이는 방치될 우려가 있다.
헌법 제127조 제3항은 대통령 자문기구 설치를 규정하고 있으나, "둘 수 있다"는 선언적 표현에 머물고 있으며, 자문기구의 실체나 기능에 대한 구체적 규정이 없어 정책 일관성 확보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기술=경제수단'을 넘어서는 헌법적 전환 필요
입법조사처는 과학기술을 단순히 경제발전의 수단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호하는 독립적 가치로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수단-목적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과학기술과 국민의 권리가 수평적으로 조화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과학기술 발전이 기본권 침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민주적 통제와 헌법적 책임 안에서 운용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헌법 제127조의 개정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주장했다.
AI 시대, 헌법도 함께 진화해야
기술이 인간 삶의 근본을 바꾸고 있는 시대에, 헌법이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인식을 고수한다면, 이는 입법적·정책적 공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AI와 데이터 중심의 사회는 더 이상 과학기술을 '산업정책의 부속'으로 둘 수 없는 현실을 증명하고 있다.
입법조사처는 이번 제안을 통해 “과학기술이 국민의 삶에 기여하면서도 동시에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헌법이 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술이 곧 인간이라는 명제를 실현하기 위한 법적 토대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