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묘 인접 세운상가 일대 초고층 개발을 둘러싸고 국가유산청과 서울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입법예고된 「세계유산법 시행령 개정안」이 강북 재개발·재건축을 위축시키는 과도한 규제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국가유산청은 “시행령에 없는 내용을 전제로 한 과장된 주장”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논란의 출발점은 서울시가 세운4구역을 최고 145m 높이로 개발할 수 있도록 정비계획을 고시한 데서 비롯됐다. 종묘 담장에서 약 173m 떨어진 이 지역에 초고층 건물이 들어설 경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의 경관과 역사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국가유산청은 유네스코 기준에 따른 세계유산영향평가 실시를 요구했지만, 서울시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유산청이 「세계유산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서울시는 강하게 반발했다. 서울시는 “시행령이 개정되면 세계유산 반경 500m 이내에서 영향평가가 의무화돼 6개 자치구, 38개 정비사업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며 “사실상 강북 지역 개발을 막는 ‘강북 죽이기 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가유산청은 이러한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국가유산청은 12일 보도설명자료를 통해 “현재 입법예고 중인 시행령 개정안에는 세계유산 반경 500m 이내에서 세계유산영향평가를 획일적으로 의무화하는 내용이 없다”고 밝혔다. 개정안의 핵심은 영향평가 대상 사업의 범위, 사전 검토 절차, 평가서 작성 기준, 평가기관과 지원센터 운영 등 법률에서 위임된 사항을 구체화하는 데 있다는 설명이다.
국가유산청은 특히 “서울시가 ‘강북 죽이기 법’으로 미리 단정해 시민들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주고 있다”며 “입법예고 이후 의견을 제시하면 될 사안을 과도하게 정치 쟁점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종묘와 관련해 국가유산청과 유네스코가 수차례 세계유산영향평가를 요청했음에도, 서울시가 ‘법적 절차 미비’를 이유로 이를 이행하지 않아 왔다고 덧붙였다.
한편 일부 언론과 시장에서는 정부와 국가유산청의 대응이 결과적으로는 개발 규제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 경제지는 사설에서 “종묘 앞 세운4구역 개발을 계기로 세계유산 반경 500m 규제가 확대될 경우, 태릉·강릉·의릉 등 다른 정비사업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주택 공급 위축과 재산권 침해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국가유산청은 이에 대해 “이번 시행령 개정은 새로운 규제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작동하지 않았던 세계유산영향평가 제도의 법적 기반을 정비하는 과정”이라며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절차”라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대법원이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국가유산청장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한 판결을 근거로, 관련 고시 정비도 검토 중이다.
종묘 앞 초고층 개발을 둘러싼 이번 갈등은 단순한 개발 여부를 넘어, 세계유산 보호의 기준과 도시 개발, 주택 공급, 지방정부의 권한이 어디까지 조정돼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시행령 입법 과정과 서울시의 대응에 따라 이 논쟁은 서울 도심 개발 정책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