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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법칙 |
1931년, 미국의 산업재해 분석가 허버트 하인리히는 ‘1:29:300 법칙’을 세웠다. 큰 사고 한 건 뒤에는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경미한 사고가 29건, 그리고 수많은 경고 신호가 300건 있었다는 뜻이다.
9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왜 여전히 이 숫자의 의미를 외면하고 있는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두 건의 땅꺼짐 사고는 이를 뼈아프게 입증한다.
2024년 8월 서대문구 연희동의 도로 붕괴 사고, 그리고 2025년 3월 강동구 명일동의 초대형 싱크홀 사고는 결코 ‘예기치 못한’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였고, 방치였으며, 결국 예측 가능한 참사였다.
■ 연희동 사고: 사고는 이미 도로 위에서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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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9일 연희동 땅꺼짐 사고 현장 -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
2024년 8월 29일, 연희동에서는 가로 6m, 세로 4m, 깊이 2.5m 크기의 싱크홀이 생기며 SUV 차량이 빠졌다.
사고 10여 분 전, 주변 CCTV에는 차량들이 방지턱도 없는 평지에서 ‘툭’ 튀듯이 흔들리는 장면이 포착됐다. 시민의 제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치도 없었다.
이 짧은 10분은 하인리히 법칙의 ‘마지막 1’에 해당한다.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을까. 아스팔트의 미세한 균열, 차량 하중에 따른 꺼짐, 민원 신고 — 어쩌면 수십, 수백 번의 징후가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300건의 신호’가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 명일동 대형 사고: 공사 중인 도시, 멈춘 감시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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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4일 명일동 땅꺼짐 사고 현장 - 출처 강동구 |
2025년 3월 24일, 서울 강동구 명일동. 대명초교입구 사거리에서 깊이 20m, 지름 20m에 달하는 싱크홀이 발생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추락해 사망했다. 현재 이곳은 서울지하철 9호선 4단계 공사와 함께 2025년 1월에 개통한 세종포천고속도로 연장 구간과 겹친다.
도시 인프라 공사와 지반 약화는 언제나 위험한 조합이다. 공사 초기 단계부터 각종 계측장비로 지반 변화를 측정하고 이상 징후를 감지해야 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러나 공사 관계자들의 안일함, 안전점검서의 형식적 통과, 그리고 관할 공무원들의 눈감음이 겹쳤다.
시민은 묻는다. ‘지하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하지만 행정은 말이 없다. 실체 없는 안전점검보고서와 사고 후 소급 조사뿐이다.
■ 무시된 300번의 기회, 되찾을 수 없는 생명
하인리히는 말했다. “대형 참사는 결코 단번에 발생하지 않는다.” 경고는 있었다.
징후는 반복되었고, 모두가 그것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 반복은 필연이 아니다.
무시된 300번의 기회를 다시 1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시민의 감각, 제보, 관찰이 제도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공사 현장마다 붙어 있는 ‘안전 제일’ 표어가 현실이 되려면,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관료주의부터 걷어내야 한다.
■ 잃어버린 숫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서울시의 2015~2024년간 땅꺼짐 사고 건수는 총228건이다. 지반침하 발생원인으로 지하시설물 손상(161건), 장기침하(42건), 지하개발공사(25건)를 들고 있다.
‘1:29:300’은 더 이상 산업재해 통계가 아니다. 대한민국 도시의 생존 공식이다.